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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마을(도창리)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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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도창리 민들레 마을은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된 청정지역으로, DMZ에서 흘러드는 신선한 바람과 맑은 물이 있고 두루미가 월동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민간인 통제선과 맞닿아 있는 이름난 곡창지대다.
     
    한국전쟁 전 도창리는 현재의 민간인 통제선 안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한국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은 전쟁의 비극과 아픔이 존재하는 동네이다.
    한국전쟁 이후 쑥대밭이 되어 피난 갔던 사람들이 옛날 도창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가장 인근의 민통선 최 남단인“서래비”라는 곳에 둥지를 틀어 새로운 도창리가 시작한 것은 1961년이다.
     
    주민들은 당시 전쟁으로 폐허 황무지였던 도창리 먼들벌판(민들레벌판)에서 개간을 시작하며 삶의 터전을 닦았다.
    당시엔 민통선 이북지역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친척이 찾아와도 군부대 허가 없이는 만나보기 어려웠다.
    1976년 민통선 검문소가 도창리 민들레 마을 북단인 지금의 위치로 북상하면서 이러한 불편을 덜긴 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농경지는 먼들벌판(민들레벌판)이 있는 민통선 이북에 있다.
    현재 177가구에 450여명이 살고 있는 도창리 민들레 마을의 주 소득원은 벼농사와 원예작물, 축산이다.
     
    벼농사 농가들은 경작면적이 가구당 평균 50,000m2(15,000평) 에 이르며 전국적으로 특미로 잘 알려진 민들레 오대쌀을 재배하고 있으며, 그 우수성을 알리고자 민들레 오대쌀이란 브랜드로 민들레 오대쌀을 판매하고 있다.
    우수성은 전국에서 주문이 이어져 수확 후 3~4개월이면(10월 수확 후) 수확량이 모두 소진된다.
    파프리카와 토마토 등 특용 작물도 작목하여 까다로운 일본에 수출하고 있으며 가구 당 평균 소득이 억 대를 능가하는 부농으로 변신하였다.
     
    최근에는 한국의 사과와 포도 재배선이 북상하여 천혜의 환경을 지닌 철원에서 부사사과와 포도 재배가 시작되었으며 과일의 당도와 맛은 전국 최고로 각광을 받아 유명 생산지의 과일보다 배가 넘은 가격에 출하되고 있다.
    단결력과 협동심도 남달라 서울 YMCA 양곡은행 쳬결마을, 새농어촌건설운동 우수마을, 녹색농촌마을 등의 사업이 성공을 거뒀고, 철원군의 `참 살기 좋은 마을'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천혜의 자연 환경을 지닌 민들레마을 도창리!!!
     
    민들레마을 도창리 DMZ 일원은 식물의 다양성과 그 생태적 가치로 인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앞으로 세계적 자원인 DMZ 민들레마을 일대의 환경자원과 생태계를 활용하여 더 큰 성장 동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도창 민들레마을 농업 경영인들은 연구하고 있다.

철원 도창리 먼들벌판(민들레벌판) 스토리


  •    [ 철의삼각지대의 금강산가는 철길 ] - 운영자의 숙부, 연합뉴스 발췌
     

    철원 도창리 DMZ 남단에는 넓은‘먼들(민들레)벌판’이 있다.
    한국전쟁 후 오랫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벌판이다. 지금도 DMZ가 지나는 길목으로 출입이 제한되고 있으나, 인근 영농인들과 군부대의 허가를 받은 일반인들은 출입할 수 있는 민간인 통제선 안의 벌판으로 한국전쟁 시 유명한 철의 삼각지대 전투라고 불리우는 철원, 김화, 평강 세 군의 지역 땅들이 만나는 곳이다.
    이들 3개의 군은 모두 남북으로 쪼개져 있다. 철원군과 김화군은 완전히 두 동강 나 있고 평강군은 남면 일대가 남쪽에 편입되 있다.
    이 쪼개진 세 군데 땅을 합해 놓은 것이 지금의 철원군이다.

    먼들(민들레벌판)과 도창리 유래

    한국전쟁 전 도창리는 동북쪽에 우구머리가 있고 남쪽에는 서레비. 서쪽에는 당꾸미가 있었으며 현재의 도창리는 수복 이후 민통선 밖의 구 도창리의 서쪽인 서레비라는 마을에 새로운 도창리가 건설되었다.
    구 도창리 앞 벌판은 옛날 철원군과 평강군의 경계였으므로 구 도창리의 시작점인 우구머리에서 보면 아주 먼 곳이다.
    그래서 도창리 사람들은 그 들판 이름을 ‘먼들’이라고 불렀다.
    다른 의견도 있다.
    도창리의 한 부락인 우구머리라는 동네에서 보면 한탄강의 시작점부터 철원평야까지 들판이 아득할 정도로 먼들이 펼쳐져 있기에 “먼들”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지리적인 영역에서 먼들, 먼 바다로 표현하듯이 말이다.

       

    ‘먼들’의 유래가 위와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들판은 멍돌밭 벌판이다.
    멍돌이란 제주도 하루방처럼 까맣고 곰보처럼 구멍이 파인 화산암으로 현무암을 가리키는 철원식 표현으로 곰보돌이라고도 불려진다.
    백두산·제주도·을릉도에서 화산이 폭발할때 철원의 이웃인 평강 부근 오리산에서도 화산이 폭발했다.
    평강고원과 철원평야는 그때 용암이 흘러가 빚어진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오리산은 해발 300m가 조금 넘는 산이지만 머리에 직경 120m짜리 분화구가 있다.
    오리산에서 화산이 폭발할 때 한탄강 상류 검불랑에서도 용암이 분출했다.
    그 용암 덩어리들이 한탄강을 따라 흘러 내리다가 반대편에 흐르는 화강 줄기 물에 부딪치며 옆으로 밀리며 거대한 멍돌밭이 되버린 것이다.
    그 벌판은 멍돌뜰로 불리다가 ‘먼들’이 되었다.

    그러면 민들레벌판은 어떻게 붙여진 이름일까?
    한국 전쟁 시 외국 군 군화에 민들레 씨앗이 묻어와 민들레가 퍼졌으며, 한국전쟁 후 포 사격 훈련장으로 변했던 이곳에 강력한 대포사격 후에도 자생력이 강한 민들레는 항상 피어 있었다.
     
    이곳의 명칭인 먼들(멍들-검은돌)은 철원식 발음으로는 멘들로 불린다.
    지역 사람들이 멘들로 부르니, 군사지도엔 아마도 미군이 영문을 Mendle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한국 전쟁 후 군인들은 영문표기인 "Mendle"을 민들레가 피어있으니 Mendle을 민들레로 혼동하여 읽었다.
    군사지역이니 민통선 안을 들어갈 때 농장 행선지를 물으면 군인들이 붙인 “민들레벌판”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지역사람들도 낭만적인 민들레벌판이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민들레벌판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현재도 먼들과 민들레벌판으로 명칭되고 있다.
    그 멋진 이름은 영어를 잘 못 읽어 탄생시킨 예기치 않은 작명이다.

     

한국 민요 중 도창리에서 불려지던 노동요인 '논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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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얼싸 덩어리요“
     
    에어라 덩어리야
    천하지대본이 농사라네
    농사 한 철 지어보세
    덩어리타령을 잘들 허네
    에미데이 하나에 새끼데이 하나씩
    세세간간이 잘 파주게
    이삼간뎅이루 넘어간다
    우리 농부 불쌍허다
    저근네 갈미봉에
    비가 한 쌍이 내려오네
    우장을 허리에 두루고
    기심 매는 농부덜아
    이 논배미가 뉘 논배미냐
    김풍지네 논일세
    덩어리타령 잘들 허게
    어떤 볍씨를 심었느냐
    여주 여천 자차베요
    진포 통진 밀다리라3)
    많이 먹어 둥튀긴가4)
    황금들판이 되었구나
    에허라 덩어리야
    우리 농부들 애들 썼네
    힘두 들구 시장한데
    정자나무로 나가보세
    김풍지네 아주머니
    술동이 이구 나와 기다리네
    술 한 잔들 먹어 보세
    에허라 덩어리야
    힘들든데 고만 하세
    힘들든데 고만 하세

    1) 삼간뎅이 : 호미질 한 번에 세칸을 파는 것으로 벼 세 포기 길이를 판다.
    2) 우장 : 비올 때 입는 옷차림.
    3) 여주 이천에는 자채벼가 유명했고, 김포 통진에는 밀다리라는 벼가 유명했다. 그 시절 이곳에서는 노인벼를 주로 심었다고 한다.
    4) 둥튀기 : 벼의 일종.
     
    김정한(남, 1916) : 지금까지 농사만 짓고 살아온 토박이로 일곱살에 부친이 사망하여 한문서당에 2년 다닌 후로는 일찍 농사일을 시작했다.
    열다섯살부터 지게를 지기 시작했고 열여덟살부터는 장정품앗이를 하였으며 이때부터 소리를 메기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열다섯명에서 스무명 정도로 조직된 농상계가 있어서 그곳에서 꽹과리를 치기도 했다.
    대부분의 농요는 6·25 이전까지 불렀으며 1960년에 마을이 수복되었으나 이때는 손으로 일을 해도 소리는 하지 않았다.
    가창자는 마을에서 소문난 앞소리꾼으로 지금은 연로해서 목소리가 약하게 나오지만 아직도 기억력이 좋아서 많은 노래를 구연할 수 있다.
    고사소리, 논삶는소리와 집터 다지는소리, 상여소리, 회다지소리, 칭칭이소리의 앞소리를 메겼고 아라리, 어랑타령, 아이어르는소리(세장세장), 새쫓는소리, 엿장사타령, 깽깽이타령, 장타령, 뱀쫓는소리 등 많은 소리를 불렀다.

    호미로 애논(초벌) 팔 때 하던 소리. 논은 세벌을 맸으며 애논은 호미로 파면서 덩어리타령을 불렀고, 두벌 논은 손으로 훔치고, 삼동은 피사리하면서 풀이 남은 것을 손으로 뽑았다.
    애논 맬 때는 여자들이 함께 일하지 않았지만 모를 심고 두벌, 세벌을 맬 때는 함께 일했다.